• '걷기왕' 백승화 감독

    백승화 감독의 메시지. 영화 '걷기왕'을 연출한 백승화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의도에 대해 귀띔했다. /남용희 인턴기자
    백승화 감독의 메시지. 영화 '걷기왕'을 연출한 백승화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의도에 대해 귀띔했다. /남용희 인턴기자

    '걷기왕' 백승화 감독, 도전이 무서운 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숨 가쁘지 않으면 나태한 낙오자로 취급받는 세상에 걸어도 괜찮다고 토닥이는 영화가 등장했다. '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표 그리고 '야망을 품어라!'는 느낌표가 마구 뒤섞여 머릿속이 복잡한 이들에게 마침표를 강요하지 않고 쉼표를 내주는 영화가 있다. 바로 '걷기왕'(감독 백승화)이 그 선물이다.

    '걷기왕'은 무조건 '빨리' '열심히'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선천적 멀미증후군 여고생 만복(심은경 분)이 자신의 삶에 울린 경보를 통해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최근 자기계발서가 필독서로 떠오르고, 뜨거운 열정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의욕을 심어주고 자신감을 고취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지나친 강요는 압박감으로 돌아왔다. 남들의 속도와 비교하니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멈춰 있다는 불안감을 주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걷기왕'은 이러한 이야기를 만복의 경험담을 통해 평온하게 그렸다. 어제 친구에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 오늘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법한 고민이 차분하게 녹아 있다. 어쩌면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는 조언이지만 우리가 꼭 듣고 싶었던 위로일수도 있다.

    최근 <더팩트>는 백승화 감독을 만나 평범한, 자칫 패배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던 만복이라는 소녀를 '걷기왕'으로 재조명한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걷기왕' 탄생 비화. 백승화 감독이 '걷기왕' 메시지를 착안한 배경을 설명했다. /남용희 인턴기자
    '걷기왕' 탄생 비화. 백승화 감독이 '걷기왕' 메시지를 착안한 배경을 설명했다. /남용희 인턴기자

    - 걷기왕, 경보, 멀미증후군 등 만복이의 설정을 어떻게 구상했나.

    "멀미한다는 설정을 먼저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뭔가 쓸데없는 걸 잘하는 주인공이 경쟁 세계에 들어가는 이야기인데 쓸데없는 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다가 걷기, 스포츠인 경보 이야기가 나왔다. 걷기를 잘하려면 학교를 걸어 다녀야 할 것 같은데 1970년대도 아니고 버스도 있지 않나. 보조 작가가 농담처럼 차 멀미가 심해서 못 타면 되겠다고 말해서 설정이 됐다. 리얼리티라고 하기엔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다. 또 어떤 대회를 나가거나 승부를 내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더라. 오목도 생각했다(웃음). 경보는 달리고 싶은 걸 참아야 한다는 점에서 좋은 소재였다."

    - 꿈을 가지라는 요즘 분위기에 반대된 발상이 신선했다.

    "어렸을 땐 만화 그리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이 대학 고민을 할 때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당연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지금 내가 만화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다른 경험도 해봐야 하는데 압박이 있다. 도전은 무섭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20대에는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웃기지 않나. 이런 부분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무겁지 않고 재밌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백승화 감독과 심은경의 인연. 백 감독은 '걷기왕' 촬영을 미루면서까지 심은경 캐스팅을 기다렸다. /남용희 인턴기자
    백승화 감독과 심은경의 인연. 백 감독은 '걷기왕' 촬영을 미루면서까지 심은경 캐스팅을 기다렸다. /남용희 인턴기자

    - 만복 역에 심은경의 캐스팅은 어떻게 이뤄졌나.

    "처음에 심은경을 캐스팅하고 싶은데 그때 심은경이 촬영 예정인 작품이 있었다. 잠깐 멈추고 반년 정도 기다렸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만큼 가치 있었다. 지금도 심은경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한다.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하면서 심은경을 떠올렸다. 심은경이 어떤 친구인지 알고 나서 만복이의 상태나 행동을 그에 맞췄다. 심은경 어머니가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은경인지 만복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평소 심은경의 걸음걸이나 말투를 만복이에게 투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러웠다. 심은경도, 나도 낯을 많이 가린다. 친해지면 금방 친해지긴 하더라."

    - 만복이와 주변 인물들 설정도 참신하다.

    "만복이는 주제와 닿아 있는 인물이다. 허둥지둥하기도 하고 어누 순간 과잉 상태가 되기도 한다. 만복이와 수지(박주희 분)를 통해 일련의 성장 과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더라. 담임교사(김새벽 분)는 소위 악역이라고들 하지만 분명 아이들에게 선의를 가진 열정 가득한 교사일 것이다. 공무원을 꿈꾸는 지현(윤지원 분)은 사회가 이런 걸 미리 알아버린 친구인지 다른 걸 기대하기 어려운 친구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중학생 때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꿈이 마을버스 기사였다. 지현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친구일 수도 있다."

    백승화 감독의 결말. 백 감독은 '걷기왕'과 만복이의 결말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남용희 인턴기자
    백승화 감독의 결말. 백 감독은 '걷기왕'과 만복이의 결말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남용희 인턴기자

    - 만복이가 마지막 목표였던 전국체전에서 보여준 감정의 변화가 인상 깊다.

    "만복이의 감정이 계속 과잉됐고 수지가 다치게 된 것도 그런 결과 중 하나였다. 만복이가 처음부터 1등으로 오버페이스하는 것도, 넘어지게 된 것도 이상하게 보였으면 좋겠더라. 혼잣말로 '할 수 있다' 중얼거리고 이상하게 세뇌된 듯한 친구처럼. 마지막에 만복이가 누워서 '왜 내가 이렇게까지 했을까'하고 뭔가 깨달음까지는 아닐지라도 한번 돌이켜볼 수 있으면 좋겠더라. '하얗게 불태웠다'는 느낌으로 다 쏟아낸 순간이다.

    만복이가 그렇다고 해서 삶의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도 그 순간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멀미를 극복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도보여행을 한다거나 경주에서 벗어나 앞으로 뭘 하고 싶을지 천천히 생각해보며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정도.

    엔딩크레딧에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됐는지 나오지만 만복이는 안 나온다. 만복이는 결론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 고민하고 시간이 더 걸렸을 것 같아서 도장을 찍지 않고 상상에 맡기려고 열어뒀다. 뭔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연출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만복이가 큰 변화를 느끼지 않고 똑같이 살 수도 있다. 일련의 과정인 것이지."

    백승화 감독의 의미심장한 결말. 백 감독은 '걷기왕'에서 화자인 소순이의 성별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남용희 인턴기자
    백승화 감독의 의미심장한 결말. 백 감독은 '걷기왕'에서 화자인 소순이의 성별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남용희 인턴기자

    - 만복이의 소원대로 수소 소순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비밀이 있나.

    "소순이는 만복이의 소원대로 새끼를 낳았다. (송아지를 소순이 옆에 데리고 온 것인가? 소순이가 스스로 수소라고 생각했지만 암소였다는 것인가?) 그냥 만복이의 소원이 이뤄진 것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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